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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취재 뒷이야기 : '의리의 경상도 사나이' 김용기 내과원장

작성자명관리자
조회수1948
등록일2016-07-12 오후 4: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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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김동수(왼쪽) 교수와 김용기 원장. 국제신문 DB

 

최근 부산 서구 충무동에 위치한 김용기내과의원 김용기(66) 원장을 인터뷰했다. 기자 생활 동안 적지 않은 인물을 만났지만 유달리 그가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기 것 챙기기 바쁜 요즘 잣대로 볼 때 그는 전형적인 경상도 특유의 '의리의 사나이'였기 때문이었다.


 외형상 그는 부산서 가장 잘나가는 내과의원 원장이다. 하루 평균 내원 환자가 800~900명이니 말이 '의원'이지 실제로는 '종합병원'급이다. 부산 유일의 거점 공공의료기관인 부산의료원의 하루 평균 환자가 1000명을 넘었을 때 기사화될 정도이니 말이다.

 '의리의 사나이'라는 용어는 그의 부산대병원 은사인 김동수 교수와의 관계 때문이다. 시계추를 되돌려 35년 전쯤으로 되돌려보자. 레지던트를 마치고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 은사인 김동수 교수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았다. 짬이 날 때 한 번 들르라는 통보였다. 후방 근무여서 가능했다. 사실 그는 군 입대 전 부산의 모 큰 병원의 순환기내과 자리를 보장받았다. 레지던지 시절 논문도 그쪽으로 많이 쓰고 관심사도 그쪽이었다. 제대 후 출퇴근의 편의를 위해 무리를 해 대출받아 살림집도 그 병원 근처로 이사를 한 상태였다.

 은사는 부산대병원 내분비과에서 곧 교수 공채가 있으니 원서를 내라고 했다. 당시 내분비과는 병원의 변방인 데다 월급도 약속된 병원의 절반도 안 됐다. 전공이 달랐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넣었는데 '제대 즉시 발령'이라는 조건으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수석졸업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김 교수의 배려였던 것이었다.

 사실상 끌려왔지만 내분비 쪽도 재밌어 신명나게 공부했다. 열심히 하니 덩달아 기회도 찾아왔다. 창원 북면 출신의 촌놈이 홍콩대 의대, 미국 토머스 제퍼슨 의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성형외과가 의대생의 꽃이 되었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내분비내과도 의료의 중심이 되었고, 그는 어느덧 내분비내과의 명의가 돼 있었다.

 은사는 정년퇴임 후 지금의 김용기내과의원 자리에 김동수내과의원을 개업해 환자를 돌봤다. 김용기 교수가 정년퇴임 5년쯤 남았을 때 은사의 호출을 또 받았다. 35년 전 상황의 데자뷔였다. 이북 출신인 은사는 예의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건강이 안 좋으니 이 병원을 맡으라우!"

 당시 그는 2개월만 더 근무하면 명퇴위로금으로 상당한 목돈을 쥘 수 있었지만 고령인 은사의 부탁아닌 부탁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끌어준 은사에 대한 보답이었다.

 내분비 질환의 갑상선을 주로 진료하던 은사와 달리 그는 병원을 맡은 후 당뇨 고지혈증 골다공증 등을 다루며 8명의 내분비 전문의를 거느리며 병원을 상당히 키웠다. 진료에만 그치지 않고 매주 자체 세미나와 전문가 초청 특강, 그리고 부산대병원 내분비내과에서 하는 최신 저널 컨퍼런스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이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고 있다. 모교인 부산대병원에 제법 상당한 금액을 매년 지원한다. 평생 공부가 지론인 까닭에 연구 프로젝트가 있는 의사들에게만 지원하라는 조건을 달고서.

 김용기 원장쯤 되면 해운대 고층 아파트의 펜트하우스에 살며 기사를 두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닐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운대와 정반대쪽에 보통의 월급쟁이가 사는 아파트에 살며 택시나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한다. 유일한 낙인 골프칠 땐 중고차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구형 중형승용차를 직접 몰고 다닌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집도 병원 근처의 허름한 단골 횟집이었다.

 소개받아 전화했지만 극구 부인하는 걸 무작정 쳐들어가 만난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왠지 모를 훈훈함이 느껴지는 건 그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참, 얼마 전 그는 은사의 9순 잔치를 50명의 제자들과 함께 성대하게 했다. 이흥곤 기자